희망찬 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뉴시니어 독자 여러분! 임인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코로나19 상황이 계속해서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전국 중환자실 병상가동률은 수도권이 86.5%, 비수도권이 72.6%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는 확진자 증가에도 불구하고 입원환자 수는 소폭 감소하는 양상인데 이는 60세 이상 연령층의 3차 접종 효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2차접종 후 확진군 대비 3차접종 후 확진군이 중증으로 진행할 위험 또한 60-74세에서 100%, 75세 이상에서 88.3% 낮게 나타났다며 정부는 백신 3차접종의 효과를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코로나19의 맹위가 멈추지 않아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국민의 건강이 염려되고 기업의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올 한 해는 코로나19의 재난 속에서도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는 3월에 새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고, 3년째 고통을 겪고 있는 코로나19의 종식을 위해 정부와 기업은 백신과 치료제의 원활한 공급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기후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탄소중
참으로 불편한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코로나에 떨고 지금은 오미크론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인류는 한동안 의약 기술의 진보로 몸 건강에 대해서는 큰 걱정 없이 살아왔다. 물론 지구촌 곳곳에서는 질병 때문에 고통 받고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서 멀쩡한 사람들이 고귀한 생명을 잃는 것이 예사였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지난 2년여 동안 인류는 전례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곤욕을 치루고 있다. 백신이 나와서 바이러스를 잡는다고 해도, 변이(變異)가 생겨서 아무리 백신이 새로 발견되어도 소용없는 꼴이 되고 있다. 하지만 끝내는 어떤 바이러스 변이라도 잡는 백신은 나오고야 말 것이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인류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더 받을 수밖에 없다. 참고 견디는 것 외에는 특별한 대안이 없다. 방역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세태(世態)와 인심(人心)을 역학(易學) 적으로 풀어 보는 것도 재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흔히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연말연시(年末年始)에는 지나간 한 해를 뒤돌아보면서 다가올 새해를 어떤 희망과 기쁨으로 맞고 싶은 충동이 일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올해는 이제 며칠 남아 있지 않은데, 이것은 어
오늘(12월 22일)은 동지 날이다. 12월22일은 1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이다. 작은설(亞歲)이라고도 불리는 이날, 옛날 사람들은 찹쌀가루로 만든 새알심을 넣어 쑨 팥죽을 사당에 올려 제사를 지내고, 이웃과 팥죽을 나눠먹었다. 액운을 없애는 의미를 담아 대문에 팥죽을 발랐다. 또한 관리들은 동짓날 임금을 찾아가 하례를 올렸다고 한다. 동지는 음(陰)의 기운이 강한 날이지만, 다음날은 다시 양의 기운이 세지는 날이다. 그래서 동지는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시기로 여겨져 왔다. 우리의 옛 것을 무조건 헌 것이라 하여 무시해 버리는 우리의 무식을 탓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다 무식하고 무지하고 미신적이어서 이런 역법을 채택했고, 세시풍속을 하나의 생활의례로서 일상화 했다는 말인가. 세시풍속은 당시 농경문화에서의 최대 페스티벌이었다. 특히 동지는 작은 설 명절이라고도 하였다. 각설하고 동지 페스티벌은 불교에서 수용해서 절에서 주로 동지문화를 계승해 오고 있다. 역사성을 따질 필요도 없이 절에서 찹쌀가루로 새알심을 만들어서 쑨 팥죽을 이웃과 먹으며 새해맞이를 하고 대문에 발라 액운 없애기도 한다. 이런 세시풍속 의례를 미신이라고 배타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문화인의 삶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전부 물질만능, 황금만능, 금권주의에 의해서 세상이 돌아가다 보니 자기는 문화인이며 문화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는 것 같다. 문화는 우리 사회의 한 행동양식이다. 어떤 세계관, 사회사상, 가치관을 갖느냐에 따라서 행동양식도 달라진다. 행동양식의 차이에 따라서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문화가 일반적으로 인간이 주어진 자연환경을 변화시키고 본능을 적절히 조절하여 만들어낸 생활양식과 그에 따른 산물들을 모두 문화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문화에 대한 일반론적인 정의가 되겠다. 우리가 문화란 일반 정의 앞에 제한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종교문화인 불교문화, 기독교 문화, 한국문화, 미국문화와 같은 복합명사를 사용할 수도 있다. 문화인이란 말도 결국에는 어떤 문화적인 배경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문화인의 정의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어렵고도 다양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문화는 음악, 미술, 문학, 연극, 영화와 같은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으
늙으나 젊으나 행복하게 살고자하는 것이 인간의 공통된 욕망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사는 형편이 다르다보니 천태만상 천태만별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마주침이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는 불로장수를 바라서 서복(서시)이라는 신하 방사(方士)를 시켜서 늙지 않는 불로초(不老草)를 구해 오도록 했다. 많은 인원과 경비를 주었으나 서복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은 세계를 정복하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권력을 누렸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그는 서정(西征)길에 있는 전장에서 칼을 차고 무수한 목숨을 죽이고 도시를 파괴하는 폭군이었지만, 마음 한 쪽에서는 무엇인가 공허함을 느꼈다. 칭기즈칸이 듣자하니 불교의 고승 해운 선사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만나 봤으나 크게 감동을 받지 못했다. 세계를 정복하면서 영토가 넓어지는 것과 비례하여 마음속에서는 허무한 생각이 더 커져만 갔다. 그는 누군가 정신적 지도자를 만나서 뭔가 신출한 메시지를 들어야만 했다. 수소문하니 당시 도교의 일파인 전진교의 수장 도사 장춘자(長春子)라는 신선이 있음을 듣고 당장 만남을 명했다. 장춘자는 본명이 구처기
추석 명절이 다가온다. 얼마나 많은 국민이 이동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코로나 19 임에도 많은 국민이 고향을 찾아갈 것이다. 민족의 대이동으로도 표현되는 명절 풍속도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포근한 사랑을 안겨준다. 나이든 분들은 대부분이 어린 시절을 시골 고향에서 보냈기 때문에 고향이 그리울 수밖에 없다. 지난 반세기를 더듬어본다면 대도시를 고향으로 두고 있는 국민도 상당수이겠으나, 그래도 시골 출신 국민이 많을 것이다. 비단 시골이 아니더라도 지방도시나 시군 읍면 할 것 없이 지방 출신들은 추석이나 설 명절에는 고향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사정이 있어서 고향에 가지 못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누구나 가고 싶은 곳이 고향이 아닐까. 이것저것 선물 보따리를 들고 찾아가던 고향 생각이 절로 난다. 나훈아의 ‘고향역’은 그래서 더 정겹게 느껴진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곱쁜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역 다정히 손잡고 고갯마루 넘어서 갈때~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 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이런 노래 가사 속에서 우리는 우
한가위 추석 명절이 다가오고 있다. 고향에 계시는 노부모들은 언제나 자식들이 오나 하고 기다려지게 된다. 금지옥엽 같은 자식들을 밖으로 내보내 놓고 걱정만 하던 부모들은 자식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고향 집을 찾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왁자지껄 들이닥쳐도 즐겁기만 한 것이 부모 심정이다. 누구나 어릴 때의 추석명절은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추석 명절이라고 해봐야 공휴일 이상의 개념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70년대 이전 까지는 누구나 고향을 찾아가서 정답고 그리운 부모형제들을 만나서 오순도순 피붙이의 정을 나누는 것이 추석명절의 우리네 풍습이었다. 추석을 한가위라고도 한다. 우리 민족의 명절 가운데 설날과 더불어 최고의 명절로 여겨왔다. 추석은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였던 시기에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연중 최대 명절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하는데, 추석의 다른 이름만으로도 중추(仲秋), 중추절(仲秋節), 가배일(嘉俳日), 한가위, 팔 월 대보름 등이 있다. 가을 추수를 끝내기 전에 덜 익은 쌀로 만든 별미 송편과 햇과일을 진설하고 조상들께 감사의 마음으로 차례를 지내는데, 옛날 같으면 일가친척이 고향에 모여 함께 차례를 지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은 엄청난 사건이다. 한 인간이 생을 마감하는 것은 그에게는 종말이요, 가족이나 친지들에게는 공간상의 존재가 사라져 버리는 인간관계의 절망이다. 탄생과 죽음은 인간의 속성으로서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사건이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은 죽음을 슬퍼한다. 감정을 지닌 동물이기에 이런 느낌을 갖고 삶과 죽음을 받아들인다. 혹시라도 불행하게 요절을 한다든지 병으로 죽게 되는 경우에도 슬픔은 마찬가지이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병사는 죽음을 전제로 한 대결을 펼치면서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각오로 피투성이가 되면서 까지 사투를 벌이게 된다. 어떤 형태의 죽음이라도 이를 즐겁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인간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복수심이나 어떤 목적을 갖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간이 있다면,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잔인한 마음을 가진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낯이 두꺼운 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백수를 누리면서 비교적 안락한 삶을 누렸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비탄이다. 그런가하면 죽음을 받
어제 저녁에 사관학교 시절 친구가 모친상을 당했다고 해서 분당에 있는 병원의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모친이 향년 95세이어서 호상이라며 음료수만 마시고 일어서려다 형제가 몇인지 물어보고 부친은 언제 작고했느냐고 물으니 부친은 6.25 때 돌아가시고 친구는 유복자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의외로 사관학교 동기생들 중 부친이 없는 친구들이 많다. 그 사연을 물어보기가 어쭙잖아 그냥 넘겨왔는데 오늘 이 친구도 그 중에 하나였다. 사관학교 1학년 휴가 때 대구에 있는 동기생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친구도 홀로된 모친이었고 바로 위의 형은 사관학교 선배였다. 사관학교 동기생들은 거의가 6.25 전쟁 중에 태어났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다는 소리를 듣기가 싫어서인지 가족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않았던 것 같다. 6.25전쟁은 우리민족에게 큰 상처를 주었지만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된 여인은 더 큰 불행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더욱이 자녀들까지 있었다면 그 삶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그렇게 공들여 키운 자식을 직업군인으로 만들어 나라에 바칠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나라 위해 희생한 남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맘이었을까? 우리나라 역사를 되돌아보면 끊일 새 없는 전쟁의 참화 속에
지난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코로나사태를 극복하지 못한 채 우울한 신축년 설날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정부의 사회거리두기시책으로 민생경제가 어려움이 가중되는 가운데에서도 또 한 해는 지나가고 흰 소의 해가 밝았다. 으례히 설날에는 그립고 보고 싶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만나고 아이들은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만나는 희망과 기쁨도 아이들의 꿈도 사라지고 말았다 . 바깥출입을 자제하면서 이제는 집안에서 즐길 수 있는 TV시청이나 실내 게임과 운동을 하는 등 일상생활의 풍속도가 많이 바뀌어 지고 있다. 설날이 오면 어김없이 즐기는 민속놀이도 올해는 실외에서 여럿이 어울려 할 수 있는 놀이보다는 실내에서 가족끼리 할 수 있는 전통 민속놀이를 골라야 될 것 같다. 가족들이 즐기는 모습을 멀리 있는 부모님을 비롯한 친인척들과 영상을 주고받으며 집에서 설 기분을 만끽하는 편이 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설날 전통 민속놀이는 모두 농경문화와 연결되어 만들어졌고 설날과 대보름 등의 정월 한 달 동안 실내에서나 실외에서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 또는 가족들과 함께 어울려 즐길 수 있는 놀이들이다. 설날은 한겨울에 있어 농사일을 오랫동안 쉬면서 맞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