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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별세]반도체VS자동차, 재계 거목의 '묘수'와 '악수'

[뉴시니어 = 조성윤 기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건희 회장이 이끌어온 삼성전자는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핵심 기업이다. 삼성전자를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게 한 일등공신은 바로 반도체다. 이건희 회장은 고 이병철 회장이 초석을 다진 반도체 사업을 집중적으로 육성시키며 TV, 스마트폰 부문에서도 세계 최고 반열에 올랐다. 반면 무리한 투자로 쓴맛을 본 삼성의 자동차 사업은 이건희 회장의 경영자 인생에 오점으로 남았다.

 

◇삼성반도체, 글로벌 초일류의 초석이 되다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지난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와 함께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한국반도체는 전자시계용 반도체를 생산하던 기업에 불과했다.

 

이후 고 이병철 회장은 1983년 2월 일본 도쿄에서 본격적인 반도체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고 천명했고, 그해 12월 미국, 일본에 이어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1년 전 27억원을 투자해 연구개발과 생산이 동시에 이뤄지는 기흥공장 건립을 결정한 이후 맺은 결실이었다. 이어 삼성전자는 1984년 256K, 1986년 1M D램 등을 개발했다.

 

기흥공장 3라인의 공사가 진행 중이었던 1987년 이병철 회장이 별세했지만, 이건희 회장은 선친의 뜻을 이어 반도체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그해 삼성전자는 4M D램 개발 방식을 회로를 고층으로 쌓는 방식의 스택(Stack)과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방식의 트렌치(Trench) 중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연구팀의 반대에도 스택 방식을 택했고, 결과는 그대로 적중했다.

 

특히 1992년에는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D램 시장에서도 1위에 등극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만 해도 6인치 웨이퍼 반도체가 대세를 이뤘던 상황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1993년 8인치 웨이퍼 반도체를 생산하는 양산공장을 준공했다.

 

이로써 삼성전자는 개발과 생산에서 세계 1위의 위치를 지속해 나갔고, 1994년 256M D램, 1996년 1G D램을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낸드플래시 부문까지 반도체 사업의 영역을 확장했다.

 

낸드플래시 부문에 대한 기술이 부족해 2001년 도시바와의 합작을 검토하기도 했지만, 이 회장은 경영진과의 논의 끝에 독자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2001년 1G 낸드플래시를 시작으로 2004년까지 매년 차례로 2G, 4G 60나노 8G 낸드플래시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이 회장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투자는 계속돼 2010년 D램과 낸드플래시를 생산하는 화성공장 16라인에 11조원, 2011년 시스템반도체를 생산하는 17라인에 13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이중 17라인은 고객사인 애플의 이탈로 2012년 10월 공사가 중단됐지만, 스마트폰 시장 확대를 예상한 이 회장의 지시로 지난해 4월 공사가 재개됐다.

 

이달 초에는 중국 시안에 반도체 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10나노 낸드플래시 생산에 돌입했다. 이를 통해 세계 낸드플래시 수요의 50%를 차지하는 중국 내에서의 안정적 공급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삼성전자는 시스템반도체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텍사스공장, 메모리반도체 중심의 중국 시안공장, 모든 반도체를 생산하는 한국 등 3각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됐다.

 

◇삼성자동차, 무리한 투자·외환위기로 실패

삼성의 자동차 사업은 이건희 회장의 개인적인 '자동차 사랑' 외에도 반도체와 함께 기업의 미래를 책임질 성장동력의 하나로 추진됐다. 지난 1992년 상공자원부로부터 #삼성중공업의 상용차 사업 허가를 받은 데 이어 삼성그룹은 1994년 승용차 사업까지 허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자동차 사업을 담당했던 삼성중공업으로는 여의치 않자 이건희 회장이 그룹 내 직접 전담 기획단을 만들어 직접 지시할 정도로 강력하게 추진했다.

 

당시 유럽, 일본 등 글로벌 업체와의 제휴를 타진하던 중 닛산의 중형차 '세피로'의 기술을 이전받기로 계약을 체결했고, 이듬해인 1995년 삼성자동차를 정식으로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삼성자동차는 부산공장 건립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공장이 들어서는 신호공단은 갯벌을 메워 만들어 지반이 약했고, 이때문에 지하에 철 기둥을 박아 건립비용이 예상을 초과했다. 생산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 품질을 강조하는 한편, 시설 투자도 과감히 단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내수 시장 경쟁을 우려한 #현대차, #기아차, 대우차(현 한국GM) 등 국내 업체의 반발도 컸다. 이들 업체의 노조가 자동차 산업의 정상화를 위해 삼성자동차를 저지해야 한다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98년 2월 '삼성이 만든 첫차입니다'란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SM5(Samsung Motors 5) 시리즈가 출시됐다. SM525V, SM520V, SM520, SM518 등을 판매한 삼성자동차는 이 회장의 주문대로 품질에 대해 시장의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숙원 사업을 이뤄낸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1997년 말 국내에 닥친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를 받기 시작하면서 내수가 급격히 위축됐고, 무리한 투자로부터 비롯된 과도한 부채는 곧바로 삼성자동차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더구나 이후 1998년 진행된 기아차 인수전에서 실패하고, 1999년 대우그룹과의 자동차-전자 빅딜도 무산되면서 삼성자동차는 법정관리를 신청하게 된다. 결국 2000년 프랑스 르노가 삼성자동차를 인수한 후 르노삼성자동차가 출범했고, 삼성은 이름만 남긴 채 자동차 산업에서 쓸쓸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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